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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2023년 07월 01일 18시 54분  조회:467  추천:0  작성자: 고구려
기행문]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환도산성전경 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2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2.5킬로메터 떨어진 환도산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에《유리왕 22년(기원 3년) 수도를 졸본ㅡ오년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위나암이 바로 환도산성이다. 환도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이어져내려 압록강북안의 여러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있는 장백산계 로령산맥의 산악에 위치해 있다. 웅장한 암산(岩山)을 타고 축조되여 남향개면(南向開面)하였고 고구려산성의 특징인 포곡형(包谷形)으로 골짜기를 끌어안은 모양이 보기에도 마음이 무거워나면서 걸음마저 들떠졌다. 여기가 바로 만주땅을 호령하고 중원까지 힘줄을 뻗치면서 동북아의 호랑이로 틀고앉았던 고구려제국의 발전기지였단 말인가. 옹성을 가진 성문이 있었다는 남문유적지를 쑥 꿰면서 곧바로 성내로 걸어들어가는 마음이 자꾸만 설레이였다. 발부리에 걸채이는 허무러진 성벽의 돌들, 여기저기 널려있는 기와파편을 바라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터졌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의 외각에 있던 군사수비성으로 국내성과 거의 동시에 쌓은것으로 판단되고있다. 고구려는 수도근처에 반드시 일종의 대피하거나 장기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수비성을 두고 때로는 수도로 쓰기도 하였다. 환도(丸都)는《알맹이》라는 뜻이다. 즉 중핵도시란 의미와 함께 수도를 가리킨다. 그러니 우리가 한창 밟고있는 이 땅이 거의 2천년전부터 400여년을 고구려문화를 형성하고 그 빛발을 만방에 뽐냈던 황성옛터인것이다. 남문을 금방 통과한후 곧추 바라보니 옹성북쪽에 산 같아보이는 둔덕이 눈에 띄였다. 전투지휘소로 알려지는 점장대라는것이다. 바로 그 둔덕의 동남쪽에 50평방메터쯤 되여보이는 작은 늪이 멀리서도 파란 물기를 반뜩이고있는데 유명짜한《음마지(飮馬池)》라고 한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재위 기원 18년ㅡ44년) 11년 7월, 한나라 료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전방안을 짜는데 좌보(左輔) 을두지가 맞서싸우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어놓으면서 수적으로 렬세이기에 꾀로 물리쳐야 한다고간했다. 왕은 을두지의 계략에 머리를 끄덕인후 성문을 굳게 닫고 적들의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수십일을 굳게 지켰으나 적들이 도무지 포위를 풀려고 않자 급해난 왕이 다시 을두지에게 계략을 물었다. 이에 을두지는 한나라군사들은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견뎌내지 못하기를 기다리고있으니 못속에 잉어를 잡아서 술을 곁들여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과연 잉어와 술을 받고는 곱다라니 포위를 푼후 퇴각해버렸다. 성안에 물과 고기, 량식이 충족한줄로 여겼던것이다. 이런 유명한 사화의 산지인 음마지를 바라고 금방 가을밭갈이를 마친 밭사이를 꿰지르는 걸음이 급하기만 했다. 마른 풀에 둘레를 가리우고있는 작은 늪은 대군의 식수원으로는 천만 부족했다. 잉어인것이 아니라 미꾸라지도 기르기엔 지금엔 힘든 늪이였다. 그러나 늪가에 앉아 맑은 물에 손을 잠그고 지략이 넘치였던 고구려장군의 충혼을 빌기에는 마음이 넉넉하기만 했다 음마지에서 자리를 떠 높이 11ㅡ12메터쯤 되여보이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와 집안시의 한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산성의 지형이 더욱 눈에 잘 안겨왔다. 자연이 만든 봉우리들의 등성이를 리용하여 석축된 산성은 동, 서, 북의 3면은 거의 반원형을 이룬 험준한 암산릉선을 돌아가기때문에 성외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고 안으로는 넓다란 언덕을 이루며 남벽만이 지세가 낮아진 강안절벽우에 있어서 천연적으로 키모양을 이루고있었다. 10만명을 능히 주둔할만큼의 장소였다. 성벽 총둘레가 길이가 6951메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676메터이다. 성안에는 4ㅡ5세기에 만든것으로 보이는 36기의 무덤이 남아있고 주추돌이 줄지어놓여있는 3개의 건물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구려의 기와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있다고 한다. 동쪽 그닥 높지 않은 릉선우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산성하고분군》이 한눈에 잡혀왔다. 아름다웠다. 아니, 웅위로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군의 하나인 산성하고분군은 한폭의 거대한 화폭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 환도산성주변에만 무려 4700여기의 고분이 있으며 집안지역 전체에는 1만2000여기가 있다고 한다. 작은 고분도 있지만 직경이 60메터 넘는 엄청난 크기의 고분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이같이 거대한 고분군은 고구려의 문화수준과 함께 경제력도 뛰여났음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든 강한 힘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700여년 강국으로 존속할수 있은 그 위대한 힘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가.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으로 대외팽창을 강행했으며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시기는 동북아세아의 력학관계가 급변하면서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외교라는 복잡한 신질서가 구축됐다. 이 틀속에서 고구려는 지리적리점과 황해의 해양활동권을 활용해서 중핵조정자로서의 역활을 했다. 5ㅡ6세기경의 고구려령토에는 동만주와 연해주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동몽골과 북방방면의 유목문화, 화북에서 올라오는 한족의 농경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남방문화 그리고 조선반도 남부의 문화 등이 하나로 모였다. 그러니 고구려가 동북아세아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가 집결된 중심지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화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우쩍 키워 고구려제국의 찬란한 력사를 이룩했을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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